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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령면

현재의 효령(孝令)은 신라초기(490년경)에는 모혜현(芼兮縣)이라고 불렀다가 경덕왕 16년(757)에 효령현(孝靈縣), 령(令) 또는 영(寧)으로 명칭이 고쳐져 630여년간 내려오다가 고려 공양왕 2년(1390)에 적라현(赤羅縣)에 합쳐져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백성들의 마음씨가 착하고 아름답다는 뜻으로 효령(孝寧)이라 이름 지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세월의 흐름에 따라 글자가 寧->靈->令으로 변하였다.

효령면의 소재지는 현재의 효령면 장기3리(고지바위)에 있었는데 지금은 그 흔적 뿐 건물은 모두 없어졌다.

기록에 의하면 동헌(東軒)을 중심으로 동남쪽 70여 걸음 되는 곳에 임창(任倉)이 있었고 동북쪽 100여 걸음 되는 곳에 옥사(獄舍)가 있었으며 또 북쪽 3리쯤 되는 현재의 장군1리(나실)에 향교가 있었다고 한다.

효령(孝令)라는 명칭은 박약지(朴約之)란 사람이 17세 때 父 상(喪)을 그 후에 母 상(喪)을 당하여 노묘(盧墓)에 각각 3년간 묘(墓)를 지키며 효(孝)를 정성껏 하던중 어느날 들불이 일어나 노묘(盧墓)까지 번지려 하자 균지가 소리쳐 울었더니 불이 저절로 꺼졌다 한다. 이 사실을 안 주위 사람들이 그 효성에 감동하여 “孝”자를 따서 孝令이라 칭함.

노행리(老杏里)
  • 4개의 자연부락 노매실(老梅實), 도장곡(道藏谷), 행동(杏洞), 심원(深源) 중에서 중심이 되는 노매실(老梅實)과 행동(杏洞)을 합쳐 노행리(老杏里)로 불림.
  • 노행1리
    • 노매실(老梅實) : 마을 북쪽에 학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산봉우리 모양이 매화 봉우리 같다하여 노매실(老梅實)이라는 설과 마을 앞 서당산이 마치 매화가 떨어져 봉우리를 맺고 있는 듯한 형세라 하여 마을명을 노매실(老梅實)이라 했다는 설이 있음.
    • 도장곡(道藏谷) : 선비들이 수도하기 좋은 곳이라 해서 도장곡(道藏谷)이라 설과 군량미를 저장하던 곳이라는 설도 있다.
  • 노행2리
    • 행동(杏洞) : 옛날 동네 뒷산에 나무가 없어서 벌거숭이 일때 살구나무가 많아 행동(杏洞)이라 불렀다고 하기도 하고, 은행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도 함.
    • 심원(深源) : 신라시대 심원사가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청주(淸州) 한씨(韓氏)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옛 절의 이름을 따서 심원이라 불렀다고 한다.
오천리(梧川里)
  • 옛날 어떤 효자가 시묘때 까마귀와 함께 살았다하여 오산이라 하였고 그 뒤 오심(梧深)이라고 불렀으며, 한일합방이후 오천(梧川)이라 하였음.
  • 임란 전까지 인동(仁同) 장씨(張氏)가 거주하였으나 임란 후 장사진이 기창 의병 하였다가 마시령산에서 전사 후 장씨 일족이 몰락 후 문화류씨(文化柳氏)가 정착하여 버드나무를 많이 심어 번성하였다.
성리(城里)
  • 약 500년 전에 도운봉공(都蕓峯公)이 참나무 숲을 개척하였다고 하여 작골(柞谷)이라 하였고 성령산하(城嶺山下)로서 성리(城里)로 개칭(改稱)됨
    • 성(城)1리 : 지금부터 약 200년전에 성령산(城嶺山) 아래 바깥쪽에 있다하여 외성(外城)이라고 하였으며, 바깥작골이라고도 불림.
    • 성(城)2리 : 성령산(城嶺山) 아래 안쪽에 있다 하여 내성(內城 )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안작골이라고도 불림.
병수리(竝水里)
  • 고려시대에 형성 되었다고 하며 사창천과 위천이 합류되는 지점 이어서 아무리 한발이 심해도 군과 병졸 그리고 일반인의 식수가 충분하였다 하여 간동(澗洞)이라고 하였다는 설 역촌으로서 서울, 대구, 안동, 경주 등지의 행인과 군마와 병사들이 쉬어가는 곳이라 전해 오고 있음.
  • 병수(竝水)는 양합류 저점이라 하여 불러진 이름으로 옛날 벼슬아치들이 군위 병수합수 구경 가자고 할 만큼의 명승지이기도 하였다.
불로리(不老里)
  • 약 260여년전 양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처음에는 불미동(不味洞)이라고 불렀다가 그 뒤 어떤 효자가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적라산 중턱에 단을 쌓고 밤마다 기원하던 중 어느날 밤 부처로부터 부친의 건강을 약속받고 집으로 돌아오니 과연 아버지의 병이 완전히 회복되어 이후로부터 이 계곡을 절골이라하고 노불상(老佛像)이 나타났다하여 불로리(不老里)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내리리(內梨里)
  • 약 250년 전 손인부 선비가 이곳에 정착할 당시 외현(外峴)과 내현(內峴)사이에 커다란 배나무가 한 그루가 있어 이현(梨峴)이라 부르다가 이곡(梨谷)이라 불려졌으며 배타라고도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내리리(內梨里)로 불려지고 있다. 옛날 이곳 주민들은 선산군 장천장을 보아 왔는데 험준한 뱃고개에서 종종 도둑이 출몰하여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그래서, 주민들은 이 고개를 넘기 위하여 100여 명씩 떼를 지어 도둑의 습격을 막았다고 한다.
중구리(中九里)
  • 300여 년 전 제일 먼저 정착한 길씨(吉氏) 집안에서 마을 터를 닦을 때 대나무가 많아서 죽리(竹里)라 불렀으며, 그 뒤 대나무가 점점 없어져 현재는 몇 집 정도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죽리로서의 의미가 사라지고 효령면(孝令面)의 중간에 위치하였다 하여 지금은 중리(中里)로 불려지고 있다.
장기리(場基里)
  • 장군리(將軍里)의 양지나실(陽地羅室)과 마주 보고 있으므로 음지나실(陰地羅室)이라 하며, 신라 경순왕 때에는 내동(乃東)이라 부르다가 한일 합병 뒤에 옛 효령(孝令) 시장터라 하여 장기리(場基里)라 부른다.
장군리(將軍里)
  • 신라가 삼국통일 할 당시 김유신(金庾信) 장군이 당나라 소정방과 합세하여 백제를 치던 중 이 곳에서 하룻밤을 유숙했는데, 그 후 고려 말엽 이 곳 주민들이 옛 일을 추모하기 위하여 장군당을 짓고 김유신, 이무, 소정방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3월 초에 향사를 지냈다. 3명의 장군이 쉬어 갔다 해서 뒷산에 효령사(孝靈祠)를 짓고 마을을 장군리(將軍里)라고 불렀으며, 구효령(舊孝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곡리(高谷里)
  • 마을 뒤 계곡이 급하고 높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며, 골짜기를 중심하여 서쪽 산맥을 긴재등이라 하고, 동쪽 산맥을 단봉(壇峯)이라 하였는데 단을 쌓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사창천(社倉川)은 가산성(架山城)을 쌓을 때 식량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던 곳으로 연유된다. 고곡(高谷)은 고암(高岩)이라 하였는데 동고암(東高岩), 서고암(西高岩)으로 나뉘고 동고암은 장기(場基) 1,2,3을 이르고 서고암은 대곡(大谷, 한실)을 일러 이를 합해 고곡리(高谷里)라 한다.
매곡리(梅谷里)
  • 옛날부터 매화가 많았다는 설과 골짜기에 동절에 눈이 많이 쌓여 꽃과 같았다는 데서 매곡(梅谷)이라 하였다 한다.
  • 매곡1리
    • 수동(壽洞) : 마을내 홍씨 정각 이름이 수산서당(壽山書堂) 이며 식수로 냇물을 먹고 생활하는데 장수하는 노인이 많고 부자가 많이 살고 정자가 좋아서 수동(壽洞)이라 전한다.
    • 상평(上平) : 현 고곡(高谷) 1리 입구 상에 있는 들을 상평(上平)들 이라고 하고 하에 있는 들을 하평(下平)들리라 하였으며 상평들에 농막(農幕)을 짓고부터 마을이 생겨서 상평(上平)이라 부른다.
  • 매곡2리
    • 독골(陶谷) : 임란시 피난온 도공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칡덩굴을 제거하고 개척하여 그릇을 굽어 만들었다고 하여 독골(陶谷)이라 불려지고 있다.
    • 탑들(塔坪) : 들 가운데 정자나무 옆에 塔이 있다고 생긴 마을 이름이라고 함.
거매리(巨梅里)
  • 리(里)의 모양이 매의 모양이고 큰 매화(梅花) 나무가 있었다고 거매(巨梅)라 불러졌다고 한다. 마을 뒤편 박타산 꼭대기에 보양사의 절터가 있으며 그 옆에 천당수라는 큰 못이 있어 가물 때 고사를 지내면 뜻이 이루어졌다 한다. 거매(巨梅) 동편에 윷판처럼 생긴 넙적한 바위가 있는데 김유신(金庾信) 장군이 잠깐 동안 윷을 놀고 간 손가락 흔적이 있다하여 그 바위를 유판지라고 하며 윷을 놀다가 김유신(金庾信) 장군이 백마를 타고 한 번에 뛰어 닿은 곳이 장군리(將軍里)라 한다.
금매리(錦梅里)
  • 마을에서 북동쪽 1km정도 떨어진 곳에 기암괴석이 있고 여름에는 찬물이 솟아 나오는 용솟음바위가 있고 외가리가 서식하는 황새마을이기도 한데 보호조 지정 마을이다.
화계리(花溪里)
  • 옛날 한양을 내왕하는 역이 있었으며, 약 400년 전 밀양(密陽) 손(孫)씨가 이곳을 개척하였고, 이 마을 안쪽에 마당산(馬堂山)이란 산이 있는데 역촌 당시 말먹이를 채취 하여 쌓아둔 곳이라 하여 마당산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소계(召溪) 등으로 불리다가 1914년 화계(花溪)로 이름을 바꾸었다. 신라 때 경주의 나환자 한 사람이 이곳을 지나다가 이 곳 물을 마시고 몸을 씻었다가 병이 완치 되어 그 이후 경주(慶州)약수터라고 불리게 되었다 또 소계(召溪)약수터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한다.
거매리(巨梅里)
  • 약 700년전 인동(仁同) 장씨(張氏)가 이 곳을 개척하였고 마시(馬嘶)의 유래는 성진이란 스님이 천마시풍(天馬嘶風, 천마가 우는 형세)의 곳이라 말했다하여 지리 풍수설 그대로 마시리(馬嘶里)라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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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 2023-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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