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래
부계면
본 면은 고려왕조이전의 연혁은 문헌이 없어 조사하기 곤란하나 고려왕조에 부계현이라 칭하여 현내(창평,가호,춘산,신화) 현서(고곡, 매곡) 부남(대율,동산,남산) 3개면으로 구획하였다가 다시 조선초기에 이르러 의흥현과 합병되었던 것이 또다시 1914년 3월 부.군.행정구역 변경에따라 정비한 현내 현서 부남의 3개면을 합병하여 부계면이라 칭하고있다.
리
- 창평1리(昌平1里)
- 창평2리(昌平2里)
- 가호1리(佳湖1里)
- 가호2리(佳湖2里)
- 춘산리(春山里)
- 대율리(大栗里)
- 동산1리(東山1里)
- 동산2리(東山2里)
- 남산리(南山里)
- 명산리(明山里)
- 신화1리(新化1里)
- 신화2리(新化2里)
창평1리(昌平1里)
- 마을 주요 연혁
- 1580년 고려왕조 이전의 연혁은 문헌이 없어 알수 없으나 서씨가 개척하였기에 서분이라하였으며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시 부계면 창평1동이라 칭하였음
- 자연 부락별 유래
- 서분 : 186가구에 720명의 인구가 살고있으며 약 400년전에 달성서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서분이라 칭하였다 함.
- 구방동(九榜洞) : 19가구에 92명의 인구가 살고있으며 이조 초기에 이 마을 사람 9인이 한양에 과거를 보러 동행하였다가 다같이 진사에 급제 하였기에 구방동이라 칭하였다함.
창평2리(昌平2里)
- 마을 주요 연혁
- 안찰사 宣允使가 마을을 개척하여 동명을 남방(藍芳)이라 칭하였고 그후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시 창평2동으로 개칭하였음
- 자연 부락별 유래
- 남방(藍芳) : 50가구에 320명 인구가 살고있으며 약 460년전에 마을을 개척당시 남색 염치풀이 있다고 해서 남방이라 하였고 1667년 이안진 선생이 마을 앞 넙풀유지(溜池)를 만들고 느티나무를 심어 마을을 조성하였다.
- 까치락 : 옛날 까치가 많이 살고있었다고 하여 까치락이라 함
가호1리(佳湖1里)
- 마을 주요 연혁
- 경주부군을 지낸 도이윤이란 사람이“이붓골”이라 하였으며 그후 이명곤이란 사람이 인동리라 개칭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시 가호1동이라 하였다.
- 자연 부락별 유래
- 인동 : 26가구에 120명 인구가 살고있으며 약 440년전에 경주부군을 지낸 도이윤이가 “이붓골”이라 하였다가 그후 이명곤이가 인동이라 칭하였다고 함
- 가실 : 27가구에 135명 인구가 살고있으며 이조인조때에 신을균이라는 사람이 이마을에 거주하여 산과 골이 아름답다하여 이마을을 가실이라하였음
- 전설 및 유래
- 이붓골 : 이조인조(李朝仁祖)때 도이윤(都以侖)가 경주부군을 지냈다가 후세에 뜻을 두고 본 마을에 왔으며 동명을 이붓골(義附골)이라 하였다.
가호2리(佳湖2里)
- 마을 주요 연혁
- 본래 의흥현 현내면 지역으로 고종 32년(1895년) 의흥현이 군으로 승격하면서 의흥군 현내면에 속하게 되었으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의흥군이 의흥면으로 개편되어 군위군에 속하게 될 때 가호동(佳湖洞)에 속하게 하여 부계면에 편입되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함에 따라 가호2리(佳湖2里)로 개칭하였다.
- 자연 부락별 유래
- 동림 (桐林) : 동림(桐林)은 400여년 전에 구씨(具氏)가 개척하였는 데 동쪽에 숲이 우거진 곳이라 해서 동림(東林)이라 했다 하기도 하고, 고려시대에 동림사(桐林寺)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하기도 함
- 살메기 : 45정의 산등에서 인공으로 메를 사육하며 각종 짐승을 잡은 구역을 칭함
춘산리(春山里)
- 마을 주요 연혁
- 1670년 경 연혁은 미정이며 창의리로 부르다가 현창이라 명칭하였고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춘산동이라 하였다.
- 자연 부락별 유래
- 현창(縣倉) : 36가구에 139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의흥현에 속하여 있을시 비축미를 보관하기 위하여 양곡을 쌓아두었기에 현창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 金水골 : 8가구에 32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년대는 미정인데 산 좋고 물이 좋아 이 골을 금수골이라 명하여 왔음
- 양지(陽地) : 23가구에 79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마을이 양지 바른곳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양지 마을이라고 하였음
- 새 터 : 6가구에 23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새로 생긴 부락이라 새터라고 전해지고 있음
- 전설 및 유래
- 國書堂 :朴姬詳 (여자)이란 사람이 사찰의 스님을 위하여 국서당을 지었음 지금도 건물이 있으며 돌 비석도 있음
- 배나들목지 : 천지가 개벽했을 때 배가 드나들면서 배를 매어두었다던 곳이라 하며 쇠말뚝도 있었다함
- 가매바위: 바위가 가마솥처럼 남아 있었기에 전해지고 있다.
- 사구지미 : 옛날에 사기그릇을 구워 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대율리(大栗里)
- 마을 주요 연혁
- 처음은 신천 강씨(康氏)가 살았다 하며 950년경 홍란(洪鸞)이란 선비가 이주해 왔으며 당시는 일야(一夜 )혹은 대야(大夜)라 마을명을 칭하다가 14세세손(世孫) 홍노(洪魯)때 부터 대율(大栗)이라 마을명을 불러 왔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대율동(大栗洞)이라 개칭(改稱)하였음
- 자연 부락별 유래
- 한밤 : 옛날에는 마을이 삼존석굴암 근처에 위치하였다고 하는데, 차츰 동지남(東地南)으로 이동되었다고 하며, 지금도 서부지역은 개발이 늦으며, 현 위치에는 가옥을 많이 지었으며,밤나무를 많이 식재하여 한밤(大栗)이라 불리었으며, 홍란씨(洪鸞氏)가 500년 洪氏의 운(運)이 여기서 피어난다고 하였다 하며, 그 후는 어느 性이 지배할지 모른다고 하였다 함.
- 오무당(五舞堂) : 옛날에 다섯 무당이 모여 살았다고 하여 오무당이라 전하여 지고있음
- 미륵불(彌勒佛) : 일명 “대율석불입상“ 삼존석굴암 미륵불은 左像에 손을 쥐고있으나, 본 미륵불은 가슴에 손을 얹고 있다. 옛날에 두 불상이 다투어 서로 다친 곳을 잡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보물제988호)
- 경의제(敬義祭) : 약 100년전 지은 건물로써 부림 홍씨의 학당이며 현재는 경로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 동산정(東山亭) : 돈영이란 도정 벼슬한 사람이 조상을 위한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건축 (1920년에 건립)
- 고래들 : 논에 물을 대면 고래가 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물이 없어진다고 해서 전해지고 있다.
- 제방(堤防) : 경오년(庚午年) 일제 치하시에 팔공산 산사태로 인한 수해로 많은 인명 피해를 낸 후 전 동민을 동원하여 전장 500미터를 돌로 쌓은 정교한 돌제방이다.
동산1리(東山1里)
- 마을 주요 연혁
- 1450년 경 문헌이 없어 알수 없으나 의흥현 부남 황청으로 전하여 오다가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동산1동으로 개칭하였음
- 자연 부락별 유래
- 황청리 : 54가구에 335명의 인구가 살고있으며 고려말엽에 강씨가 개척하여 부남(缶南)으로, 그 후 진(陳)씨 및 최(崔)씨가 황청(黃淸)으로 마을명을 부르고 마을이 하늘과 같이 맑은 뜻으로 전해지고있음
- 전설 및 유래
- 강번들 : 신라중엽에 강(康)씨가 많이 살고 있었다고 하여 강번들이라 전해지고 있음
- 송내 : 전설 및 유래는 알수 없으나 송내사(松柰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함
- 오도암(五導岩) : 년대는 알수 없으나 五人의 중이 도를 닦기 위하여 절을 세운것 이라고 전해지고 있음
동산2리(東山2里)
- 마을 주요 연혁
- 1630년 경 洪樵隱이란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여 신리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동산2동이라 하였음
- 자연 부락별 유래
- 莘 里 : 43가구에 183명의 인구가 살고있으며 약 350년전에 洪樵隱 이란 선비가 栗里로부터 이마을을 처음 개척하였다 하여서 新里라 마을명을 부르다가 그후 莘里로 개칭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음
- 전설 및 유래
- 遠慕齊 : 洪樵隱공의 時祭를 지내기 위하여 후손이 세운 祭室
- 樵隱處士缶林洪公 藏修 遺之 : 이 碑石은 초은공이 처음 개척하였다고 후손들이 세운것이며 碑文은 근래 大儒이신 重濟 金榥이 지으셨다.
- 宕巾바위 : 마을앞들가운데 조산에 있는 탑이 흡사 탕건모양 같다 해서 탕건바위라고 하며 전설에의하면 탕건바위가 밖을 보고 있기 때문에 外孫이 科擧에 급제 한다해서 탕건바위를 마을 안으로 보게 돌려 놓았다고 한다.
남산리(南山里)
- 마을 주요 연혁
- 1508년에 문헌이 없어 알수 없으나 中宗 庚寅八月에 書院이라 하였다가 그후 缶南으로 있을 당시 5개 자연부락을 1, 2동 분동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남산동으로 개칭 하였음
- 자연 부락별 유래
- 書 院 : 29가구에 168명의 가구가 살고있으며 약 470년전에 中宗 庚寅八月에 書院이라 하였다.(원래 院底洞)
- 작은실 : 9가구의 29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서원에서 북으로 약1.5㎞ 지점에 위치한 작은골에 자리 잡아 작은실이라 함
- 갖 골 : 31가구의 159명의 인구가 살고있으며 약 700년전 고려중엽때부터 자연부락이 있었으며 부계면에서 제일 갓쪽에 위치하여 枝谷(가지골)이라 전해지고있음 缶林洪氏가 경기도로부터 南下-이 부락에 제일 먼저 基地한 부락임
- 首 山 : 26가구에 128명의 가구가 살고있으며 약 1,000년전에 자연부락이 제일먼저 자리잡은 마을이라고 首山이라함
- 屯 德 : 28가구에 165명의 인구가 살고있으며 약350년전에 부락이 생겨 군위군과 달성군이 접하고있어 이조중엽에 큰 陳을 친 곳이라 둔덕이라 하였음
- 遺物 및 遺蹟
- 三尊石窟庵 : 문헌이 없어 알 수 없으나 학자들의 추정에 의하면 1407년에 건립하였다고 하며, 경주 석굴암보다 약 150년 앞서 세운 것 이라고 전해 지고있음 (1962년 12월 23일 國寶 제109호 지정)
명산리(明山里)
- 마을 주요 연혁
- 1580년 경주이씨가 개척하여 新光里라 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현 明山洞이라 칭하였다.
- 자연 부락별 유래
- 경주이씨가 新光里에 정착할 당시는 양지바른곳에 아침해가 일찍 떠오른다고 신광리라하고 후에 경주김씨가 정착한 후 현 효령면 마시2리(한자골) 보다는 마을이 더 크고 위에 위치하고 있으니 위는 머리를 상징함으로 거수리라 하였음
신화1리(新化1里)
- 마을 주요 연혁
- 1480경 연혁은 알수없으나 거북이가 않은 자리와 같다고 하여 龜毛라고 하였다.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화1동이라 개칭하였다.
- 자연 부락별 유래
- 龜 毛 : 35가구에 125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서기 1480년경 거북이가 앉은자리와 같다고 龜毛라고 마을명을 지었다고 원래 현 마을 밑에서 동네가 개척되어 살다가 서기 1930년경 현재 살고 있는 마을로 이주 하였다고 함
- 沙余谷(새락골) : 16가구에 75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1525년경에 밀양박씨가 새로운 부락을 형성하고 강가 마을에서 왔다고 하여 새락골이라 함
- 주요전설 및 유래
- 왜두덕 : 서기 1678년경에 의병 홍천래장군이 처음 왜병과 교전하여 무찌른곳이라 왜두덕이라 하였음
신화2리(新化2里)
- 마을 주요 연혁
- 1670년 밀양박씨와 경주 김씨가 이마을을 개척하여 신월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화2동이라 개칭하였다.
- 자연 부락별 유래
- 新 月 : 22가구에 89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서기 1570년경 밀양박씨가 谷內에 먼저 자리를 잡고 이어 경주 김씨가 자리를 잡았다. 마을 이름은 新院이라고 하고 이마을앞에 조그마한 못이 있어 울창한 수목이 우거져 있어 수목사이에 여덟집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어느날 대사가 이곡내를 통하게 되어서 오다가 날이 저물어서 이연못 뚝에 올라 서서 연못을 내려다 보니 달빛이 연못에 비치자 대사가 하는 말이 과연 이 것이 신월이구나하여 그 후에 신월이라고 전해 지고 있다.
- 주요전설 및 유래
- 도둑골 : 옛날 도둑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었기에 도둑골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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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 2023-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