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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흥면
예부터 구산(龜山, 귀산) 또는 구성(龜城) 등으로 부르던 지역이었는데, 기록이 없어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모르나, 전해오는 속설에 의하면 ‘낮게 기어가는 거북이의 형상보다는 의(義)롭게 일어나 흥(興)하라는 의미로 고쳐 부르는게 좋다.’고 하여 의흥(義興)으로 쓰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속설에 의하면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이곳에서 많은 의병(義兵)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의흥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 고도 한다.
의흥은 통일신라 시대 때 하리, 중리, 파립, 우보 등 4개 면을 통합하여 구산현(龜山縣)이라 하였고, 1018년 안동부의 속군으로서 의흥군(義興郡)이 되었다가, 1390년 부계(缶溪)현을 속현(屬縣)으로 거느리는 독립된 의흥군이 되었다.
1413년(태종13년)에는 의흥현(義興縣)으로 격하하였고, 1895년(고종32년)에 대구부의 의흥군(義興郡)으로 승격하였다가 이듬해 경상북도의 의흥군으로 되었다. 1914년 부군면령에 의흥면 중리면, 하리면, 파립면, 소수면의 일부를 병합하여 군위군 소속의 의흥면이 되었고, 1983년에 산성면의 금양(錦陽)과 원산리(元山里)를 편입하였다.
현재 11개의 법정리와 36개의 자연마을을 관할하고 있으며, 면사무소는 의흥면 읍내길 39(의흥면 읍내리 420-16)에 위치해 있다.
리
읍내리(邑內里)
- 읍내(邑內)라 함은 1914년 의흥군(義興郡)과 군위군(軍威郡)이 합병될 때 군 소재지였으므로 읍내(邑內)라 칭했다.
수북리(水北里)
- 의흥 위천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수북리(水北里)라고 부름.
수서리(水西里)
- 의흥 위천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수서리(水西里)라고 부름.
이지리(梨枝里)
- 부락이 항상 따뜻하여 사람 살기에 알맞은 곳이라 가지곡(可止谷)이라 불렀는데 후에 가지(可止)가 가지 지(枝)자로 바뀌어 지동(枝洞)이라 칭했다. 또는 가지골에서 동쪽으로 이현(梨縣)이 있으며 이곡(梨谷)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예로부터 품질좋은 배가 생산되어 임금님께 진상했다 한다.
파전리(芭田里)
- 고치동(高致洞), 중동(中洞), 하동(下洞) 이렇게 3동을 합쳐서 구한말 당시 는 의흥군(義興郡) 파립면 파전동(芭田洞)이란 행정 명칭을 가졌지만, 그 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파전동(芭田洞)이라 칭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신덕리(新德里)
- 한 때 천연두가 의흥(義興) 고을에 만연하고 있었으나, 이곳만은 한 사람도 전염되지 않아 사망자가 없어 덕(德)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불리어진 이름이다.
지호리(芝湖里)
- 지초(芝草)가 무성한 작은 호수가 있는 부락의 편에 위치한다하여 불리어진 이름이다.
연계리(蓮桂里)
- 부락 가운데 연못이 있는데 이 못에 흰 연꽃이 많이 피었으며 또 닭같이 쉬지 않고 땅을 파일구어 잘 사는 부락이란 뜻에서 불리어진 이름이다.
매성리(梅城里)
- 마을 뒤편에 높은 산이 있는데, 이 산의 혈(穴)을 사람의 혈에 비유하여 산의 형태가 중간이 잘록하여 사람모양과 비슷하여, 여자 혈(穴)이라고 부른다, 매(梅)란 말은 이 산의 혈을 여자에 비유하여 붙여졌다고 전한다. 한편으론 고려시대 몽고족의 침입으로 이 곳에 성을 쌓고 군사들이 주둔 했으며 백성들이 피란하였다고 하여 성(城)자를 붙여 이 마을을 매성(梅城)이라 했다고 한다.
금양리(錦陽里)
- 금양리(錦陽里)
- 검동(儉洞) : 1379년 경에 칼을 잘쓰는 황무생(黃武生)이란 장군이 마을을 개척하여 칼 검(劍)자를 써서 검동(劍洞)이라한다.
원산리(元山里)
- 예로부터 마을주변에 동서남북으로 산이 많다 하여 “원(元)”“산(山)”를 써서 원산(元山)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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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 2023-10-05